주일 목사님 설교를 올립니다. |
2024년 2월 18일 산 소망이라는 위로(베드로전서 1:3~5)
2024.02.19 23:33
동영상URL | https://youtu.be/pM0cLume_mo?si=FfeXAHi3fOfF3GF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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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 소망이라는 위로
베드로전서 1:3~5
2024. 2. 18 황승연 강도사
※ 설교의 앞부분 일부가 정상적으로 녹화되지 못했습니다. 영상 아래에 첨부한 설교원고를 참고해주세요.
베드로전서 1:3~5 : 산 소망이라는 위로
Ⅰ. 들어가면서
혹시 “꽃들에게 희망을”이라는 책을 아십니까? 트리나 폴러스라는 작가가 1972년에 출간한 책으로 이제까지 전 세계적으로 수백 만권이 팔린 유명한 책입니다. 간결한 내용을 가지고 있지만, 무거운 질문을 우리에게 남깁니다. 책의 내용을 간략하게 소개하려고 합니다.
어느 잎에서 태어난 호랑 애벌래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태어난 잎에서 하루하루 살아가던 그는 그저 먹고 배부른 것만이 삶의 전부가 아니라는 생각에 태어난 곳을 떠나 모험을 떠납니다. 모험 중 저 멀리 어떤 기둥이 보이고, 그 기둥을 향해서 바쁘게 기어가는 애벌래 떼를 보고 그 대열에 합류합니다. 가까이 보니 그 기둥은 꿈틀거리면서 서로 밀고 올라가는 애벌레 더미, 말하자면 애벌레 기둥이었습니다. 꼭대기는 구름에 가려 무엇이 있는지 알 수 없었지만, 그 기둥 끝에 혹시 자신이 여태 찾던 삶의 의미가, 만족을 줄 무엇인가가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며 호랑 애벌레도 그 기둥을 오르기 시작합니다. 하지만 애벌래 기둥을 오른다는 것은 생각보다 더 처참하고, 외롭고, 고달픈 일이었지요. 모두가 서로를 디딤돌 삼아 밟고 올라서거나, 밑에 깔리거나 다른 선택지는 없었습니다. 끊임없이 경쟁하고, 밟고 올라서며, 피어오르는 고민과 회의감을 애써 달래가며 결국 기둥 꼭대기에 오른 호랑 애벌래는 보게 됩니다. 허무를 보았습니다. 아무것도 없었던 것이죠, 그리고 주변에 자신이 오르던 기둥 외에 다른 애벌래 기둥이 많다는 것도 알게 됩니다. 무엇에 홀린 듯 모든 애벌래들이 허무를 향해 끊임없이 서로를 희생시켜 발 빠르게 밟고 올라서려고 하는 광경을 보게 됩니다. 참으로 허망한 세상 속에서 사는 것이 분명하지요.
작중에 나오는 이야기는 오늘의 세상을 많이 떠올리게 합니다. 모두가 돈, 명예, 권력, 편안이라는 저마다의 기둥을 오르기 위해 혈안이 되어 서로를 밟고 올라서고자 하는 무한 경쟁 사회에서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경쟁의 끝에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까요? 저마다 소원해서 거머쥔 기둥 끝에서 만족할 수 있을까요? 우리는 그 대답이 아니라는 사실을 압니다. 그 끝에는 호랑 애벌래가 만난 것처럼 허무함을 제외하고는 아무것도 없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무한 경쟁 사회 속에서 여러 가지 어려움을 겪으며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작중에 호랑 애벌래에게는 노랑 애벌래가 찾아옵니다. 함께 그 기둥을 오르던 노랑 애벌래는 나비가 되어 자신을 떠난 그에게 복음을 전해줍니다. “너는 기둥을 오를 필요가 없어, 넌 나비거든”라고 말이죠.
오늘 베드로전서는 흩어진 나그네인 성도들에게 이와 같은 복음을 말해주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세상 속에 있는 교회는 편안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가야 하는 십자가의 길과 세상의 풍조는 반대이기 때문입니다. 이 세대를 본받지 않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려고 하니 물살을 거슬러 올라가는 것이 힘들고, 그 물결에 동화되어 기둥을 오르자니 우리 안에 계신 성령이 호소합니다. 어느 것 하나 쉽게 선택하지 못하는 우리에게는 베드로를 통해 전해지는 말씀이 필요하다고 확신합니다.
Ⅱ. 본론 : 우리는 산 소망을 가진 자들입니다!(3~5절)
우리가 살펴보고 있는 베드로전서는 로마의 변두리(소아시아)에 있는 성도들에게 위로를 전하는 편지입니다. 당시 세상은 로마를 소망하고, 로마의 사치와 향락의 문화를 쫓아가기에 열심이었습니다. 다들 기둥을 올라가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었죠. 하지만 “믿음”이라는 이름으로 그 기둥을 자처하여 내려가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이들이 바로 산 소망을 가진 성도들이었습니다.
자연스레 이들은 비방을 당합니다. 주변 이웃들은 이들이 같은 달음질을 감당하지 않는 것을 이상히 여기며 비방하기도 했습니다(벧전4:4). 예수 이름 믿는 것 때문에 눈앞에 여러 가지 시험들로 인해 그들은 힘들고 괴로워하고 있습니다(6절).
쉽지 않은 현실을 살아가고 있는 성도들에게 전했던 복음은 “우리는 택하심을 받았다”는 사실로 시작합니다(1절). 그래서 지난 설교를 통해 우리가 어떤 존재인지 성경의 사실을 통해 알아야 한다고 말했던 것입니다. 세상이 우리를 평가할 때는, 가까운 친구나 가족이, 심지어 자신이 보기에 스스로 미약해 보일지라도 하나님의 눈에 우리는 택하심을 받은 교회입니다. 스펙이 모자라고, 다른 뒷배가 없는 것 같아 두려울 때에 우리가 이미 무엇을 가지고 있는지를 기억할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로마(세상)가 안겨줄 수 있는 무엇인가가 아무것도 없을지라도, 성도는 하나님 안에서 어떤 존재인지를 알았던 바울의 외침을 들어보십시오.
<고린도후서 6장 8절~10절> (쉬운성경)
8 ... 우리는 거짓말쟁이로 취급받았지만, 사실은 진리를 말하였습니다.
9 무명인 취급을 받았으나 사실은 유명한 사람들이며, 죽은 자로 여겨지기도 했으나 보시는 바와 같이 우리는 살아 있으며, 매를 많이 맞았지만 죽지 않았습니다.
10 또 슬픈 사람 취급을 받았으나 우리는 항상 기뻐하였으며,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유하게 하였고, 아무것도 가지지 않은 자 같으나 우리는 모든 것을 소유한 사람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붙들어야 하고, 날마다 확인해야 하는 정체성입니다. 복음은 부요함 그 자체입니다. 그 복음을 품고, 복음을 전하며 살아가는 우리는 모든 것을 가진 사람임을 기억하십시오. 세상이 안겨주는 복음이 없어도, 우리는 하나님의 택함을 받아 삼위 하나님의 호위 속에 살아가는 인생입니다. 만유이신 예수님께서 우리 안에 계시니 우리는 모든 것을 가진 사람입니다. 이 감격스러운 사실을 베드로의 입을 통해서도 확인해봅시다.
<3> 1~2절의 인사말 이후, 베드로는 곧바로 찬양을 하기 시작합니다. 헬라어로는 가장 먼저 “찬송하리로다!(εὐλογητός)”라는 탄성으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베드로가 위로를 전할 때, 하나님에 대한 찬송으로 시작한다는 것은 흥미롭습니다. 이는 베드로의 상황을 생각해보면 더욱 그렇습니다. 베드로는 이 편지를 보내면서 지금 자신과 함께 있는 교회를 거론하는데(벧전5:13), 그는 자신이 어느 지역에 있는지 명확하게 기술하지 않고 ‘바벨론’이라는 지명을 언급합니다. 이 지명은 유대의 역사 속에 나타나는 바벨론과 동일한 곳으로 이해하기보다 로마를 상징적으로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더 자연스럽습니다. 그곳은 어떤 곳입니까? 같은 공동서신인 요한계시록을 통해 살펴보면 그곳은 음행과 가증함, 사치가 가득한 곳, 어린양을 따르는 성도와 증인의 피로 취해있는 땅입니다(계17:4-6). 물론 베드로전서와 기록 시기가 30여년 차이가 나기는 하지만, 그 심장부에서 어린양을 따르는 성도들도 여러 어려움이 있었을 것이라 예상됩니다. 또한 온 세상의 성도들도 여러분과 같은 고난을 겪고 있다는(벧전5:9) 언급을 통해, 베드로 자신도 세상 속에 있는 교회로 살아가며 여러 시험 가운데 있었음을 유추해볼 수 있습니다.
정리하자면, 베드로는 세상에 흩어진 나그네로 로마의 변두리를 살아가고 있는 성도들과 같이 고난을 겪고 있는 사람입니다. 흩어진 나그네의 한숨과 괴로움을 동일하게 겪고 있고 안다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특별한 사람이었습니다. 초대교회의 리더쉽이었죠. 하지만 그가 특별하다는 것은 은혜로 맡겨진 일이 특별한 것이지, 여러 가지 시험을 어려움 없이 넘어가는 초인이었다는 말이 아닙니다. 같은 상정의 인간이지 않습니까. 하지만 그런 그가 위로를 전하고 있다는 것은 자신도 은혜로 누리게 된 위로가 있다는 것을 전제하는 것이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서신의 인사말 이후 곧바로 “찬송하리로다!(εὐλογητός)”로 시작하며 이어지는 찬송의 내용은 자신이 만났던 위로일 것입니다. 그는 같은 처지에 있는 성도들이 이 위로를 함께 누리기를 간절히 원했을 것입니다. 그가 이같이 간절함을 가지고 전하려고 하는 위로가 무엇인지 계속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베드로는 거듭난 우리가 산 소망을 가진 자들이라고 말합니다. 이 소망은 세상이 주는 소망, 우리가 세상에서 바라는 소망이 아닙니다. 베드로가 말하는 산 소망은 주어진 것입니다. 우리의 외부로부터 주어진 것입니다. 하늘에서 온 것입니다. 무엇을 근원으로 우리에게 산 소망을 주셨습니까? 하나님의 자비로움입니다. 하나님은 ‘자비(ἔλεος)로우십니다’는 말은 불쌍히 여긴다, 개역 개정에는 이를 ‘긍휼’이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사람의 자비와 긍휼은 마릅니다. 받는 이의 행실과 베푸는 이의 사정이 변함에 따라 수십번도 바뀝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자비, 긍휼은 다릅니다. 애초에 그분은 우리의 사랑스러움을 보고 자비와 긍휼을 베풀어 주시지 않았습니다. 창세 전에, 우리가 아직 이 땅에 나기도 전에,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기도 전(롬9:11)에 우리를 자비로운 눈길로 바라보시는 하나님께서 먼저 우리를 향해 출발하셨습니다. 이 사실이 우리에게 어떤 위로를 줍니까. 우리는 더 이상 사랑을 빼앗길까 전전긍긍하지 않아도 됩니다.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은 마르거나 쇠하지 않습니다. 세상을 다 주고서라도 우리를 원하는 분이 계십니다. 우리의 탁월하지 못함에, 어여쁘지 못함에 혹시나 주어진 것이 거두어질까 두려워하지 않아도 됩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의 고용주, 투자자가 아닙니다.
무엇을 통해 산 소망을 주셨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사건을 통해 주셨습니다. 이것이 말해주는 것은 2가지입니다. 먼저, 예수님의 십자가 부활은 이미 역사 속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누군가가 일어난 일을 왜곡하고 은폐하려 시도할지라도, 없다 할 수 있습니까? 그럴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밖에 이 일을 두셨습니다. 그리고 이 일을 통하여 우리에게 산 소망을 안겨주셨습니다. 우리의 어떠함도 이 사실을 가리거나 무효로 만들 수 없습니다. 이미 역사 속에 일어난 객관적인 사실을 통해 우리의 구원이 변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비유컨대, 역사라는 큰 돌 위에 지워지지 않게 새겨놓은 것이죠.
둘째, 예수님의 부활은 장차 도래할 우리의 실재입니다. 예수님을 통해 예고편을 보여준 셈이지요. 부활 사건은 생명으로 사망을 삼킨 일입니다. 죽음이 왕노릇 하고있는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우리가 어떻게 될지를 보여주는 사건입니다. 우리는 어떻게 됩니까? 예수님과 같이 부활합니다. 죽음이 우리를 삼키더라도, 우리는 영원한 생명으로 다시 살아납니다. 하늘에 오릅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 보좌 우편에 계신 것과 같이 우리도 영원한 그 나라를 누립니다.
<4> 이어지는 4절은 산 소망의 내용이 무엇인지를 말해줍니다. 그리고 부활을 통해 장차 우리에게 도래할 실재를 또 한 번 반복함으로 확증합니다. 산 소망의 내용은 우리가 상속받을 유산이 준비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쉬운성경은 이를 “하나님께서 그분의 자녀들에게 주려고 준비해 두신 복”으로 번역하고 있어 그 상속이라는 개념이 조금은 희미해 보입니다. 하지만 개역개정에서는 “유업을 잇게 하신다”는 표현으로, 헬라어는 4절의 시작을 “상속, 유산(κληρονομία)”을 뜻하는 단어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아들로서 아버지의 모든 복을 상속받으실 때, 이를 함께 상속받는 자로 우리가 부름 받았음을 밝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장차 영원한 아버지의 나라와 그 안에 속한 모든 것을 상속받으실 것입니다. 우리는 이를 함께 상속받는 것입니다. 하늘 아버지의 모든 것이 우리의 것입니다. 장차 도래할 그 나라의 모든 영광을 함께 잇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영광스러운 사실이 변하지 않음을 베드로가 얼마나 많이 반복하고 있는지를 보십시오. 아버지께서 그분의 자녀들인 우리에게 주려고 준비해 두셨다고 말하지 않습니까. 쉬운성경은 “준비해놓았다” 정도의 어감이지만, 개역개정은 “간직해두었다”라고 말합니다. 헬라어의 의미로는 “지키다”입니다. 하나님이 친히 간수해놓으셨다는 것이죠. 우리에게 주시기 위해서 말입니다. 하나님이 친히 간수하시고, 이미 준비해놓았으니 우리는 때가 왔을 때, 받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산 소망의 특징을 살펴봅시다. 우리가 예수님과 함께 상속받을 유업은 어떤 특징이 있을까요?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않는” 특징을 가집니다. 쉬운성경은 “썩거나, 아름다움이 변하지 않는다”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베드로전서를 자세히 살펴보면 베드로가 이 표현을 계속 반복합니다. 우리가 구원받음으로 인하여 가지게 되는 “산 소망(하늘로부터 온 소망)”과 “죽은 소망(세상으로부터 온 소망)”을 반복해서 대조합니다. 죽은 소망, 세상이 주는 소망의 대표는 “금”입니다. 베드로전서에 “금”이 자주 등장합니다. 이것은 “소유”의 문제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추구하고 우리에게 안겨주려고 하는 “가치관”입니다. 베드로는 우리가 이미 가지고 있는 믿음이 연단 되는 것이 정제된 금보다 더 귀하다고 말합니다(벧전1:7). 금은 불에 의해 단련되기는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 닳아 없어지고 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닙니다. 우리의 대속의 근원을 말하며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와 대조하여, 은과 금은 없어질 것(썩어질 것)이라고 말합니다(벧전1:18-19). 여인들에게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었던 거룩한 부녀들을 상기시키며, 썩어 없어지는 금과 아름다운 옷으로 단장하려고 하지 말고 마음에 숨은 사람을 하나님의 것으로 단장하라고 권면합니다(벧전3:3-5). 말했던 것처럼, 이는 “소유”의 문제가 아니라 “가치관”의 문제입니다. 세상은 하나님이 아닌 다른 것들로 우리에게 소망을 주려고 하나님이 이 땅에 허락하신 좋은 것들을 이용합니다.
베드로가 썩어질 것들을 계속 언급하며, 썩지 아니할 하나님의 것과 대조시키는 목적이 무엇이겠습니까? 우리로 무엇이 더 좋은지 생각해보라는 것입니다. 무엇을 소망하는 것이 더 나을지 판단해보라는 것이지 않겠습니까. 땅의 것을 가지는 것은 분명 복된 일이나, 그것을 세상의 외침에 속아 우리의 내일 약속해줄 것이라는 복음으로 여기며 살아간다면 우리는 영원하고 그 아름다움이 변하지 않는 하나님이 간직해두신 유업을 이미 가졌음을 잊고 살아가는 안타까움 속에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썩어질 것에 목매며 그것이 복음인 것 마냥 전전긍긍하며 살아갈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썩어질 것이라는 사실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더 좋은 것이, 영구한 것이, 아름다움이 변하지 않을 것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5> 이제 우리는 썩지 않고, 그 아름다움이 변하지 않는 하나님께서 친히 우리를 위하여 준비하시고 간직해놓으신 가장 좋은 복이 임하길 믿음으로 기다립니다. 구원의 날이 임할 때, 세상의 끝이 도래할 때 우리는 믿음으로 기다리고 소망하던 것을 온전히 가지고 누리게 될 것입니다. 소망하는 미래에 대한 굳건한 믿음은 우리에게 오늘을 감당할 수 있는 힘을 줍니다. 이는 우리가 이 땅에서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는 사실입니다. 청년들이 오늘의 신음과 근육의 찢어짐을 아파하면서도 운동을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기대하고 기다리는 소망에 대한 믿음이 굳건할수록, 아프고 귀찮고 하기 싫어도 합니다. 그런 경험이 있는 사람은 정말 신실하게 감당합니다. 심지어 고통을 즐거워하기도 합니다. 학생들은 내일을 기대하며 오늘을 포기하고 학업을 감당합니다. 재미있어서 하는 것이 아니지요, 가끔씩 회의감을 느끼기도 하지만, 이내 마음을 잡습니다. 무엇으로 잡습니까? 미래에 대한 소망으로 잡는 것입니다.
다시 돌아와서, 베드로의 외침을 들어보십시오. “너희는 말세에 나타내기로 예비하신 구원을 얻기 위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하심을 받았느니라!”(5절,개역개정) 여기서 받았느니라(φρουρουμένους)는 현재형으로, 지금도 하나님이 보호하고 계심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기다림 속에 홀로 내버려 두시지 않습니다. “보호함(φρουρέω)”은 마치 옥을 지키는 옥졸이나, 파수꾼에게 어울릴 만한 단어입니다. 죄인이 도망치지 못하게 붙들어 매고, 누군가가 죄인을 풀어주지 못하게 지키는 것입니다. 파수꾼의 역할이 무엇입니까? 대적의 침입과 다른 위험이 도둑같이 임하지 않도록 망을 봅니다. 그 때 사용되는 단어를 가지고 하나님의 보호하심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안팎으로 우리의 구원을 지키고 계십니다. 밖으로는 믿음으로 살아가는 우리를 삼키기 위하여, 우는 사자와 같이 대적이 우리를 주목하고 있지만(벧전5:8), 괜찮습니다. 우리를 호위하고 계시는 이가 있습니다. 졸지도 주무시지도 않는 분이 완벽하게 우리를 보호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이 보호하심을 위해 베풀어주시는 능력(δύναμις)은 예수님께서 베푸셨던 “기적적인 능력”을 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우리에게 간직해놓으신 유업을 우리에게 마침내 안겨주시기 위하여 지금도 기적적인 능력을 베풀어 주고 계신다는 의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우리에게 하나님을 향한 믿음이 있습니까? 그렇다면 그것은 무엇을 말해줍니까. 성경의 증언대로라면, 하나님의 보호하심이 진실이라는 반증이지 않습니까. 그렇게 하나님께서는 이미 이루신 일을 근거로 우리의 믿음의 여정을 시작하시고, 지금도 완벽하고 우리를 보호하고 계시며, 세상 끝날이 오기까지 쉬지 않고 이 믿음의 경주를 마치게 하실것입니다. 하나님은 반드시 간수해 놓으신 유업을 우리의 품에 안겨주실 것입니다. 이 사실을 굳게 믿는 우리가 되기를 소원합니다.
Ⅲ. 나가면서
이제 설교를 정리하려고 합니다. 세상의 물결을 거슬러 성도로 살아간다고 하는 것, 쉽거나 호락호락한 일이 아님이 분명합니다. 우리의 힘으로는 이 경주를 완주해내지 못할 것입니다. 하지만 눈으로 보이지 않지만, 성경이 증거 해주는 우리의 정체성, 산 소망을 가진 자들이라는 소식을 날마다 확인하십시오. 나비가 된 노랑 애벌래가 호랑 애벌래에게 말해주었던 그가 나비라는 소식이 기둥 오르기를 포기할 수 없었던 그의 인생을 바꾸었습니다. 자신의 존재를 알았기 때문입니다. 만약, 그 소식이 전해지지 않았다면 그의 인생은 어떻게 흘러갔겠습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보배로운 믿음을 가진 자들입니다. 그리고 택함 받았다는 구원의 은혜가 너무 커서, 더 이상 세상과 같이 기둥을 오르지 않기로 결단한 자들입니다. 썩어질 세상이 선전하는 복음을 뒤로 하고, 영원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쫓아가는 자들입니다. 장차 우리를 위하여 간직하여 놓으신 썩지 않고, 더럽지 않으며, 쇠하지 않는 유업을 예수님과 함께 영원토록 누릴 자들입니다. 상속받을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이를 지키고 계시니 누가 빼앗겠습니까. 우리는 진정한 부동산을 가진 셈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부요한 것입니다. 잠시 이 땅을 걸어가고 있을 뿐입니다. 우리의 소망이 실재가 될 그 날을 기대하고, 고대하며 삽시다. 가끔은 이 소망이 희미해질 때도 있겠지만,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산 소망은 우리를 부끄럽게 만들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영원한 영광이 기다리고 있는 본향을 가진 나그네들입니다. 우리가 이 땅을 나그네처럼 지나갈 수 있는 여유가 어디로부터 오겠습니까? 이 사치와 거짓의 땅을 여행자와 같이 지나갈 수 있는 여유는 더 좋은 것이 진실로 우리에게 있다는 굳건한 믿음으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이를 위하여 우리는 날마다 예수님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성경의 약속을 확인해야 합니다. 성경을 펴고, 기도의 손을 놓지 말아야 합니다. 육신의 눈으로 본 말씀이 육신의 일에 그치지 않고, 영의 시간으로 누려질 수 있게 성령께 구해야 합니다. 매일의 일상 속에서 이런 시간을 가지는 것이 너무 중요합니다. 그 중요함을 아는지, 청년대학부 G.B.S시간은 경건나눔으로 시작합니다. 누가 잘했고, 못했고를 판단하는 시간이 아닙니다. 도전받고 격려하는 시간인 것입니다. 성령 안에서의 교제하며, 나도 모르는 사이에 누군가에게 나비가 되어주고 베드로가 되어주는 시간인 것입니다. 서로의 입술을 통해 나누어지는 은혜가 마치 우리 마음에 미약하게 뛰던 산 소망이라는 심장을 일깨워, 다시 힘차게 박동하게 해주는 듯한 시간이 우리가 나누는 교제의 시간이요, 우리의 교제의 시간이 그런 현장이 되어야 하는 것이지 않겠습니까.
후세대교회를 넘어 우리 삶 속에 사랑받지 못해 외로워하거나, 가진 것이 없어 비참해하거나, 미래를 불안해하는 형제·자매들에게 위로를 전하는 나비처럼 사시길 기도하겠습니다. 성경의 위로로 믿음으로 살아가는 성도의 모습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누군가의 산 소망을 일깨워주는 위로의 전달자로 쓰임 받게 될 것입니다. 우리의 삶이 성경의 위로를 누리고, 성경의 위로를 전하는 인생 되기를 소원합니다.